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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순절은 신비의 보물입니다 신성한 달력의

초대 교부들이 설명했듯이, 거룩한 사순절은 주님의 신성한 달력에 있어서 봄입니다. 한해 전체를 위해 영적으로 저장하는 계절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40일 동안 금식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특별한 기회입니다.

올해 사순절의 메시지는 다음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육적인 습관 또는 감정적인 애착/묶임들로부터의 자유
  2. 양심과 마음의 정결함을 살펴보는 것
  3. 내 자신/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것
  4. 거룩하고 달콤한 고난
  5. 자신을 치는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 또는 통회 그리고 변화
  • 첫번째로는: 육적인 습관 또는 감정적인 애착/묶임들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의 몸은 다양한 식습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특정 종류/유형의 음식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먹는 것들이 우리가 원하는 특정한 방식으로 조리된 특정 종류의 음식이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먹는 음식의 종류를 끊임없이 바꿔가며 (메뉴를 늘 바꾸며) 먹길 원하며 필요로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몸에서 우리가 해방 되어야 할, 특정한 자국과 습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유지하는 음식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음식이 우리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기록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 4).

주님의 이 말씀이 언제 우리의 내면의 존재 가운데 깊숙이 들어가서 우리가 이 말씀을 믿을 것입니까? 그래서 육체의 음식이 우리에게 더 이상 권위를 갖지 않게 되는 것입니까? (마치 음식이 우리 삶의 원천인 것처럼요!)

이 일이 일어날 때,  금식의 시간은 더 이상 음식에 대한 부정적인 박탈감이 생기는 기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금식으로 인해 우리의 몸은 종종 신음하며, 금식하는 것이 어려워 보이기 때문에 우리를 약하게 느끼게 하며 언짢게 느끼게끔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이 일어나게 되면 오히려 음식과 금식 사이의 연관성이 풀어지게 (자유케) 됩니다. 금식의 계절은, 우리가 영으로부터 육체의 무거움을 일시적으로 걷어내어 풀어주면서 영을 활성화 시키는 영적인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녀의 영광스러운 해방으로의 더 깊은 자유를 향하게 하는, 자유의 한 분량 또는 한 단계입니다.

감정적 또는 혼적인 애착/묶임들에 대해서:

교부들은 사순절 동안에 수도원을 떠나 자신들이 완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막으로 갔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어떤 종류의 감정적인 집착이나 애착으로부터 분리되고 떼어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애착과 묶임들은 사람들을 향한 것일 수 있습니다 (수도원에 있는 형제들, 수도원을 방문하는 친구들, 또는 가족일 수 있습니다).  장소에 대한 애착/집착일 수도 있습니다 – 즉 수도원 자체와 그에 연관된 추억들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물론 성자들과 은혜의 방문들에 관한 복된 추억일 지라도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입는 것, 자는 것과 관련된 육체의 욕구로부터 몸의 자유함에 관해서 언급했던 것처럼, 사람들과의 관계들에 대한 애착/묶임들로부터의 혼의 자유케 됨도 있습니다.

몸의 자유와 혼의 자유는 우리의 영이 영적 영역으로 높이 날아 올라갈 수 있도록 깊고 진정한 풀어짐이 있게 합니다. 그래서 신랑을 위한 신부적 사랑에 불을 붙이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하늘의 고향을 인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의 임시적인 여정 가운데 깨어있고 주의하는 체류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몸과 혼이 좁은 길을 갈때 영의 넓어짐과 자유를 가져옵니다.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 7: 13, 14).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좁은 길이 생명의 길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이 길을 찾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좁은 길에서 시작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혼은 곧 길을 잃고 그 길로부터 이탈하여 우리를 너무나 편안하고 좋고 넓은 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파멸의 길인데도 말입니다.

금식의 절기들, 특히 거룩한 사순절은, 이 진리들이 새롭고 실제적인 차원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나고 주목하며 우리의 혼이 좁은 길로 가도록 회복하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그 길은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 두번째로: 양심과 마음의 정결함을 살펴보는

우리의 양심에 혼탁함을 가져다 주고 우리가 마음의 정결을 잃어 버리게 하는 일상의 사건이나 상황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들은 우리의 금식을 무효화 시킵니다. 금식의 외적인 형태/행위는 먹는 음식을 바꾸고, 얼마 동안 먹지 않는 시간을 지키는 것이지만 이것이 금식의 목적은 아닙니다. 그 목적은 깊은 것들을 얻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양심을 깨끗게 씻고, 마음의 정결함을 위함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금식의 외적인 형태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고전 8:8)

또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 17).

특히 이 금식, 즉 사순절 가운데 나의 진정한 목표는, 광야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단의 광야에서 40 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십니다 (인간으로서만 금식하셨다면 그것은 이미 끝난 과거의 행동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금식은 확장된/연장된 효과를 갖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지금 그곳 요단의 광야에 계시며, 우리 구원의 경륜의 일부분으로 그분께서 금식하신 금식의 신비 가운데 계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양심을 살펴보고 그것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큰 관심과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가 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나의 금식이 사순절의 신비의 한 부분인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만남이 없이, 먹고 마시는 것과 관련된 외식적인, 외적인 영적 행위가 되지 않도록 해야하겠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 만남을 위해 나의 마음을 준비해야합니다. 이 만남은 진정한 것이며 광야는 신비한,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그곳에 들어가게 하시고, 나를 기다리시며 나를 원하시는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하시고 싶은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분은 내가 그리스도의 신비 가운데 들어가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통찰력을 여시고, 나의 어두워진 눈을 여셔서 당신의 신비를 바라보고, 당신이 보시는 방법으로 모든 일들을 보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신랑으로서, 그리고 구원자로서의 그분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그분과 연합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금식의 광야에서, 메시아로 부르심과 관련된 모든 일, 즉 메시야로서 그분의 사역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비전들을 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의 율법으로부터 벗어난 이스라엘을 보셨습니다- 그들을 중풍병자, 눈먼자, 긿을 잃은 자들로, 억압받는 자들로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마비증(중풍병)과 보지 못하는 병을 치유하는 일에 주목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신부적 사랑과 거룩한 기쁨이 이스라엘에게 풀어지도록, 그래서 열방 가운데서의 그들의 부르심을 회복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구세주에 대해 전함으로써 열방에 알려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시편에서 다음의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 67: 1, 2).

교부들은 우리에게 마음의 정결함에 있어서 여러 단계들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마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 17: 9).

따라서 마음에는 많은 인내가 필요하며,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점차적으로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가 마음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Grace dwells in the heart)!

그렇습니다, 초대 교부들의 다음의 말씀을 외우도록 합시다: ‘은혜는 마음 가운데 거합니다 (Grace dwells in the heart).’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아니,  삶 전체에 있어서 큰 차이를 일으키게 합니다. 우리가 읽는 것, 듣는 것, 보는 것, 해야하는 것, 모두가 달라집니다. 이 모든 변화는 마음 속에 거하는 은혜가 그 사람을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생각 가운데 빛을 비추며, 그 사람 자신의 정상적인 인지/지각의 영역 이상의 문제들을 이해하게 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깊은 내면을 빛으로 밝히고, 계명이 기록되는 민감한 양심을 갖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8: 10 – 12).

거룩한 사순절은 위대한 신비, 많은 신비로 가득한 위대한 보물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그 신비 가운데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단지 외적인 모습과 형태로 금식하며, 단순한 외식적인 영적 관행으로써 행하고 있습니다.

아! 우리가 사순절의 신비에 들어가면, 세상을 본받고 따르는 우리의 혼이, 십자가와 화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해방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가까이 다가가게 하며, 그분의 부활의 은혜로부터 공급 받게 됩니다. 부활절이 오기 전, 사순절의 기간 동안에도 그분의 부활의 은혜로부터 공급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은혜가 사람의 마음 속에 거하는 것을 보실 때, 그분은 당신의 마음을 그 사람의 마음 가운데 계시하시고 당신의 신비를 위탁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특히 이 마지막 때에 맡기실 것, 위탁하실 것들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마음과 신비를 맡기시고 계시 하실 수있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시편에 기록되기를: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편 25: 14). 또한 잠언 3장 32b절에 기록되기를: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이것은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흐를 수 있게 하며,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날들을 약화 시키며, 우리의 해들을 허비하게 하는 사망을 내쫓아 버립니다.

우리는 사순절의 신비가 너무나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신비에는 광야에서의 그리스도의 신비,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주시는 신비, 침궁의 사랑에 관한 신비, 신랑과 신부에 대한 신비가 있습니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아 2: 4-6).

  • 세번째는: 자기 자신/자아로부터 벗어나기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기에는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에덴 동산 자체를 떠난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산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에덴 동산이라는 지리적인 장소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교통과 교제하며, 신성한 따뜻함, 사랑, 빛, 편안함 및 그분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생명을 받으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동산을 떠났을 때, 그들은 거할 곳이 없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물리적인 지리적 차원의 의미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 존재의 차원에서 거처가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알몸이 되었습니다. 이것도 옷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신비한 겉옷이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을 감싸고 있었던 그 신성한 겉옷을 잃었을 때, 그들은 다른 것을 찾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가난하고 비참한 결과에 놓이게 되었는지요! 그들은 신성한 겉옷을 무화과 잎으로 맞바꾸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화과 잎은 그들의 벌거벗음을 덮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기에는 신비가 있습니다.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아 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포로 말입니다. 그들 자신의 존재의 실제적 현실은 영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기로, 즉 그분의 영으로, 영적으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신, 자아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들의 자손으로서 동일한 비극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자아의 포로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가 더 이상 이것을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이 정상적인 상황이 된 것처럼요! 잘못된 거꾸로 된 상태가 정상적인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원래의 정상 상태는 부재하고 심지어는 인식되지 못하고 감각도 잃게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초대 교부들은 사도 베드로의 서신서에서 가져온 특정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그 표현은: “마음에 숨은 사람 (the hidden person of the heart).”

먼저 다음의 말씀을 보도록 합시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4).

사도 베드로는 부인들에게 입는 옷과 또는 외모와 꾸밈/장식에 집중하지 않고 마음 안에 있는 진정한 꾸밈과 장식에 대해 주의를 주었습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는 표현에 유의하십시오. 마음은 안으로 침몰했습니다. 마음은 덮이고 묻혀졌습니다. 진정한 장신구의 신비를 지닌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임에도 불구하고 숨겨져 있고 외딴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묻혀 있는 이 마음을 깨울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시 64: 6).

이것이 사순절의 신비입니다. 이 사순절 금식이 특히 우리 안에 묻혀 있고 각 사람에게 특정한 생명의 신비를 품고 있는 마음을 깨우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죄의 상처가 마음을 죽은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묻혀 버렸고 더 이상 어떤 것도 감지하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의 동떨어진/밖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표면에 살면서 실제로 우리 자신과는 떨어져/틀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자아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이 사순절 금식은 우리 자신의 감옥에서 빠져 나오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깨우고 우리 안에서 되살아 나게 합니다. 탕자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he came to himself” (눅 15:17). 다시 말해서, 탕자의 마음이 자신 안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마음이 깨어나자 마자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끊임없는 갈망함으로 즉시 뛰게 되며 박동하게 됩니다 – 왜냐하면 그 마음은 하나님의 생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삶은 변화되고, 하나님의 노래가 그 마음 가운데 시작됩니다. 시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내 영광아 깰찌어다” (시 57: 8). 여기서의 의미는 나의 혼 또는 마음이 깨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서 시편 기자는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라고 말합니다. 혼이 갇혀진 포로상태로부터 벚어 나게 되면 구원의 노래가 그 안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부들의 기록들 가운데 사순절은 “낙원으로 돌아가는 여정 (the journey of returning to Paradise)” 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땅에 속한 낙원, 즉 옛 에덴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낙원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 하셨을 때, 원수가 우리를 다시 유혹하여 우리의 새로운 자리를 또 잃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가 거할 장소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직접 우리의 거처가 되시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며,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요 14: 20).

또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중보기도 가운데 다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요 17: 21).

  • 네번째로: 거룩하고 달콤한 고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슬픔(근심)들이 있습니까!

여러가지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상황은 다양합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때로는 나의 슬픔/근심의 원인이 되거나 내 안의 내적인 위기/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그들이 나를 질식 시키는 것과 같은 상황). 질병들; 분명한 이유 없는 피로와 피곤함; 무능함과 마비의 상태; 무의미​​함과 지루함등이 있습니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슬픔 (근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슬픔/근심을 정확하게 묘사하면서 우리에게 도움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우리는 세상의 치명적인 슬픔/근심을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도망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망치는 곳은 때로는 매우 어리석은 곳입니다. 술을 마시거나, 마약 또는 미디어에 의지합니다. 우리는 잊어 버리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시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의적으로 무의미함 가운데로, 혼란 가운데로, 상실감 가운데로 자신을 처하게 합니다. 슬픔/근심은 우리 안에서 증가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슬픔/근심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직면하는 방법을 알지도 못하지만 직면하기를 원하지도 않는 상태에 있습니다.

사순절은 묻혀진 슬픔/근심과 그 숨겨진 원인들과 직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금식하고, 엎드려  절하며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육에 제한을 가하고 엄격하게 하여 혼에 있는 슬픔의 곳간들이 열리고 씻겨지며, 그것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의 근면/부지런함은 때로는 “빛을 비추는 슬픔 (illuminating sorrow)”이라고 불립니다. 육체에 가하는 긴장감과 제한 때문에 그것은 “슬픔”입니다. 그것은 또한 “빛을 비춥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슬픔으로부터 자유케 되며 구원의 기쁨 가운데로 우리를 회복시키기 때문입니다. 시편 51편 12 절에 기록되기를: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아들에 관한 성경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 10).

놀랍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상함을 받게 하시며 질고를 당하게 하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it pleased Him –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외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이것은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매우 신비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기쁨은 하나이고 연합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결과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 53: 10, 11):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우리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아버지의 기쁨이기도 한 아들의 고통/고난에 참여하기를 원합니까?

그것은 빛을 비추는 슬픔입니다; 그것은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쁨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차원의 기쁨입니다; 참된, 진정한 기쁨입니다. 위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기쁨이며 영원한 위로로서 우리의 영혼 가운데 부어집니다. 주님께서 친히 다음의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해 주십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 24).

또한, 예수님께서 고난의 절정에 처해 계셨을 때 중보기도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 13).

우리는 그분의 고난에 참여 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습니까? 그분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신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망가졌고 훼손 된 것을 보시고 계십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의 신부가 세상의 더러운 것으로 얼룩덜룩 해진 것과, 신부의 장식들을 잃어 버린것과, 완전히 그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보시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아픔 가운데 기다리십니다. 당신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기쁨에 참여할 자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 13).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달콤한 고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고난의 교제/참여함을 경험할 수 있으며, 그것은 항상 우리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인정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때로는 음부로까지 내려가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고, 지옥과 같은 시간을 통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곧 방문하시고 우리를 위로 향해 올라가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의 기쁨을 맛보고 또한 아버지의 기쁨의 대상이 됩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지식은,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과 함께 음부로 내려가는 것과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완성 될 수 없습니다. 다음 말씀을 기억해 봅시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4: 9, 10).

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부활의 권능에 참여 하고자 그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 10).

  • 다섯번째는: 자신을 치는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또는 통회 그리고 변화

사순절은 또한 통회와 자기 부인의 금식입니다. 성 금요일로 끝나는 이 금식은 구약 성경의 속죄일과 연결된 것입니다. 속죄일은 자기 자신을 치는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자기를 부인하는 날로 설명 되었습니다: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레 16: 29).

‘And this shall be a lasting statute for you: in the seventh month, on the tenth of the month, you must deny yourselves’ (LEB).

그렇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자기 부인과 스스로를 치는 (괴롭게 하는) 것을 배우고 경험해야합니다. 우리의 혼은 교만하고, 자만하며, 오만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경륜 가운데서 우리의 혼의 교만함을 깨뜨리고 겸손하게 할 수 있는 특정 상황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판토크라토(Pantocrator, 전능하신 우주의 지배자) 이심을, 그리고 모든 것을 통제하시고 그분이 허락하시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때때로 허락하시는 어려운 상황과 상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바꾸도록 합시다. 이 세상의 임금이 (사단) 제안하는 세상 사람들의 태도와 방식을 따라 긴장하고, 동요하며 불안해 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하며 하나님의 경륜을 온전한 신뢰로 받아들이고 우리를 위한 그분의 구원을 기다립시다.

그렇게 하는 그 시점에 은혜가 우리 안에 거하기 시작할 것이고, 주님이신 그리스도 당신께서 점차적으로 우리 영혼에 거하시고 우리의 영혼 안에서부터 그분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집트의 콥틱 교회의 전통에 따라 성 금요일에 하는 각 방향마다 수많은 엎드려 절하기 (400 번)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이 땅의 사방의,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스스로 괴롭게 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다면, 그리고 우리 내면 안에 거하시는 것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면, 그분께서는 세상의 구원에 있어서 우리를 당신과 함께 참여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로브의 성 세라핌 (Saint Seraphim)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평강으로 가득 차십시오 (평화의 왕인 그리스도와 연합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당신 주변의 수천 명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신 후에 은혜의 변화의 상태입니다.

그렇습니다. 변화산의 구름은 우리의 영혼과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 가운데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 3: 16).

하나님의 뜻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기념책으로 하늘을 채우겠습니까?

먼저 이 금식의 회개를 통해 책에서 죄를 지워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롬 8 : 29)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변화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책을 희게 만들도록 합시다.

그러면 주님을 위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거룩함, 우리의 예배,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우리의 영적인 열심과 근면에 대한 기억들이 적히고 새겨질 수 있도록 우리의 책이 준비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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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부들이 설명했듯이, 거룩한 사순절은 주님의 신성한 달력에 있어서 봄입니다. 한해 전체를 위해 영적으로 저장하는 계절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40일 동안 금식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특별한 기회입니다.

올해 사순절의 메시지는 다음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육적인 습관 또는 감정적인 애착/묶임들로부터의 자유
  2. 양심과 마음의 정결함을 살펴보는 것
  3. 내 자신/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것
  4. 거룩하고 달콤한 고난
  5. 자신을 치는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 또는 통회 그리고 변화
  • 첫번째로는: 육적인 습관 또는 감정적인 애착/묶임들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의 몸은 다양한 식습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특정 종류/유형의 음식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먹는 것들이 우리가 원하는 특정한 방식으로 조리된 특정 종류의 음식이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먹는 음식의 종류를 끊임없이 바꿔가며 (메뉴를 늘 바꾸며) 먹길 원하며 필요로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몸에서 우리가 해방 되어야 할, 특정한 자국과 습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유지하는 음식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음식이 우리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기록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 4).

주님의 이 말씀이 언제 우리의 내면의 존재 가운데 깊숙이 들어가서 우리가 이 말씀을 믿을 것입니까? 그래서 육체의 음식이 우리에게 더 이상 권위를 갖지 않게 되는 것입니까? (마치 음식이 우리 삶의 원천인 것처럼요!)

이 일이 일어날 때,  금식의 시간은 더 이상 음식에 대한 부정적인 박탈감이 생기는 기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금식으로 인해 우리의 몸은 종종 신음하며, 금식하는 것이 어려워 보이기 때문에 우리를 약하게 느끼게 하며 언짢게 느끼게끔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이 일어나게 되면 오히려 음식과 금식 사이의 연관성이 풀어지게 (자유케) 됩니다. 금식의 계절은, 우리가 영으로부터 육체의 무거움을 일시적으로 걷어내어 풀어주면서 영을 활성화 시키는 영적인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녀의 영광스러운 해방으로의 더 깊은 자유를 향하게 하는, 자유의 한 분량 또는 한 단계입니다.

감정적 또는 혼적인 애착/묶임들에 대해서:

교부들은 사순절 동안에 수도원을 떠나 자신들이 완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막으로 갔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어떤 종류의 감정적인 집착이나 애착으로부터 분리되고 떼어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애착과 묶임들은 사람들을 향한 것일 수 있습니다 (수도원에 있는 형제들, 수도원을 방문하는 친구들, 또는 가족일 수 있습니다).  장소에 대한 애착/집착일 수도 있습니다 – 즉 수도원 자체와 그에 연관된 추억들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물론 성자들과 은혜의 방문들에 관한 복된 추억일 지라도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입는 것, 자는 것과 관련된 육체의 욕구로부터 몸의 자유함에 관해서 언급했던 것처럼, 사람들과의 관계들에 대한 애착/묶임들로부터의 혼의 자유케 됨도 있습니다.

몸의 자유와 혼의 자유는 우리의 영이 영적 영역으로 높이 날아 올라갈 수 있도록 깊고 진정한 풀어짐이 있게 합니다. 그래서 신랑을 위한 신부적 사랑에 불을 붙이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하늘의 고향을 인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의 임시적인 여정 가운데 깨어있고 주의하는 체류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몸과 혼이 좁은 길을 갈때 영의 넓어짐과 자유를 가져옵니다.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 7: 13, 14).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좁은 길이 생명의 길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이 길을 찾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좁은 길에서 시작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혼은 곧 길을 잃고 그 길로부터 이탈하여 우리를 너무나 편안하고 좋고 넓은 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파멸의 길인데도 말입니다.

금식의 절기들, 특히 거룩한 사순절은, 이 진리들이 새롭고 실제적인 차원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나고 주목하며 우리의 혼이 좁은 길로 가도록 회복하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그 길은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 두번째로: 양심과 마음의 정결함을 살펴보는

우리의 양심에 혼탁함을 가져다 주고 우리가 마음의 정결을 잃어 버리게 하는 일상의 사건이나 상황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들은 우리의 금식을 무효화 시킵니다. 금식의 외적인 형태/행위는 먹는 음식을 바꾸고, 얼마 동안 먹지 않는 시간을 지키는 것이지만 이것이 금식의 목적은 아닙니다. 그 목적은 깊은 것들을 얻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양심을 깨끗게 씻고, 마음의 정결함을 위함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금식의 외적인 형태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고전 8:8)

또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 17).

특히 이 금식, 즉 사순절 가운데 나의 진정한 목표는, 광야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단의 광야에서 40 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십니다 (인간으로서만 금식하셨다면 그것은 이미 끝난 과거의 행동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금식은 확장된/연장된 효과를 갖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지금 그곳 요단의 광야에 계시며, 우리 구원의 경륜의 일부분으로 그분께서 금식하신 금식의 신비 가운데 계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양심을 살펴보고 그것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큰 관심과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가 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나의 금식이 사순절의 신비의 한 부분인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만남이 없이, 먹고 마시는 것과 관련된 외식적인, 외적인 영적 행위가 되지 않도록 해야하겠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 만남을 위해 나의 마음을 준비해야합니다. 이 만남은 진정한 것이며 광야는 신비한,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그곳에 들어가게 하시고, 나를 기다리시며 나를 원하시는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하시고 싶은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분은 내가 그리스도의 신비 가운데 들어가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통찰력을 여시고, 나의 어두워진 눈을 여셔서 당신의 신비를 바라보고, 당신이 보시는 방법으로 모든 일들을 보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신랑으로서, 그리고 구원자로서의 그분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그분과 연합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금식의 광야에서, 메시아로 부르심과 관련된 모든 일, 즉 메시야로서 그분의 사역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비전들을 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의 율법으로부터 벗어난 이스라엘을 보셨습니다- 그들을 중풍병자, 눈먼자, 긿을 잃은 자들로, 억압받는 자들로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마비증(중풍병)과 보지 못하는 병을 치유하는 일에 주목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신부적 사랑과 거룩한 기쁨이 이스라엘에게 풀어지도록, 그래서 열방 가운데서의 그들의 부르심을 회복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구세주에 대해 전함으로써 열방에 알려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시편에서 다음의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 67: 1, 2).

교부들은 우리에게 마음의 정결함에 있어서 여러 단계들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마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 17: 9).

따라서 마음에는 많은 인내가 필요하며,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점차적으로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가 마음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Grace dwells in the heart)!

그렇습니다, 초대 교부들의 다음의 말씀을 외우도록 합시다: ‘은혜는 마음 가운데 거합니다 (Grace dwells in the heart).’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아니,  삶 전체에 있어서 큰 차이를 일으키게 합니다. 우리가 읽는 것, 듣는 것, 보는 것, 해야하는 것, 모두가 달라집니다. 이 모든 변화는 마음 속에 거하는 은혜가 그 사람을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생각 가운데 빛을 비추며, 그 사람 자신의 정상적인 인지/지각의 영역 이상의 문제들을 이해하게 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깊은 내면을 빛으로 밝히고, 계명이 기록되는 민감한 양심을 갖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8: 10 – 12).

거룩한 사순절은 위대한 신비, 많은 신비로 가득한 위대한 보물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그 신비 가운데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단지 외적인 모습과 형태로 금식하며, 단순한 외식적인 영적 관행으로써 행하고 있습니다.

아! 우리가 사순절의 신비에 들어가면, 세상을 본받고 따르는 우리의 혼이, 십자가와 화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해방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가까이 다가가게 하며, 그분의 부활의 은혜로부터 공급 받게 됩니다. 부활절이 오기 전, 사순절의 기간 동안에도 그분의 부활의 은혜로부터 공급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은혜가 사람의 마음 속에 거하는 것을 보실 때, 그분은 당신의 마음을 그 사람의 마음 가운데 계시하시고 당신의 신비를 위탁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특히 이 마지막 때에 맡기실 것, 위탁하실 것들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마음과 신비를 맡기시고 계시 하실 수있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시편에 기록되기를: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편 25: 14). 또한 잠언 3장 32b절에 기록되기를: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이것은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흐를 수 있게 하며,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날들을 약화 시키며, 우리의 해들을 허비하게 하는 사망을 내쫓아 버립니다.

우리는 사순절의 신비가 너무나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신비에는 광야에서의 그리스도의 신비,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주시는 신비, 침궁의 사랑에 관한 신비, 신랑과 신부에 대한 신비가 있습니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아 2: 4-6).

  • 세번째는: 자기 자신/자아로부터 벗어나기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기에는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에덴 동산 자체를 떠난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산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에덴 동산이라는 지리적인 장소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교통과 교제하며, 신성한 따뜻함, 사랑, 빛, 편안함 및 그분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생명을 받으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동산을 떠났을 때, 그들은 거할 곳이 없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물리적인 지리적 차원의 의미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 존재의 차원에서 거처가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알몸이 되었습니다. 이것도 옷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신비한 겉옷이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을 감싸고 있었던 그 신성한 겉옷을 잃었을 때, 그들은 다른 것을 찾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가난하고 비참한 결과에 놓이게 되었는지요! 그들은 신성한 겉옷을 무화과 잎으로 맞바꾸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화과 잎은 그들의 벌거벗음을 덮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기에는 신비가 있습니다.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아 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포로 말입니다. 그들 자신의 존재의 실제적 현실은 영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기로, 즉 그분의 영으로, 영적으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신, 자아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들의 자손으로서 동일한 비극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자아의 포로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가 더 이상 이것을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이 정상적인 상황이 된 것처럼요! 잘못된 거꾸로 된 상태가 정상적인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원래의 정상 상태는 부재하고 심지어는 인식되지 못하고 감각도 잃게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초대 교부들은 사도 베드로의 서신서에서 가져온 특정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그 표현은: “마음에 숨은 사람 (the hidden person of the heart).”

먼저 다음의 말씀을 보도록 합시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4).

사도 베드로는 부인들에게 입는 옷과 또는 외모와 꾸밈/장식에 집중하지 않고 마음 안에 있는 진정한 꾸밈과 장식에 대해 주의를 주었습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는 표현에 유의하십시오. 마음은 안으로 침몰했습니다. 마음은 덮이고 묻혀졌습니다. 진정한 장신구의 신비를 지닌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임에도 불구하고 숨겨져 있고 외딴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묻혀 있는 이 마음을 깨울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시 64: 6).

이것이 사순절의 신비입니다. 이 사순절 금식이 특히 우리 안에 묻혀 있고 각 사람에게 특정한 생명의 신비를 품고 있는 마음을 깨우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죄의 상처가 마음을 죽은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묻혀 버렸고 더 이상 어떤 것도 감지하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의 동떨어진/밖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표면에 살면서 실제로 우리 자신과는 떨어져/틀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자아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이 사순절 금식은 우리 자신의 감옥에서 빠져 나오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깨우고 우리 안에서 되살아 나게 합니다. 탕자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he came to himself” (눅 15:17). 다시 말해서, 탕자의 마음이 자신 안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마음이 깨어나자 마자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끊임없는 갈망함으로 즉시 뛰게 되며 박동하게 됩니다 – 왜냐하면 그 마음은 하나님의 생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삶은 변화되고, 하나님의 노래가 그 마음 가운데 시작됩니다. 시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내 영광아 깰찌어다” (시 57: 8). 여기서의 의미는 나의 혼 또는 마음이 깨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서 시편 기자는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라고 말합니다. 혼이 갇혀진 포로상태로부터 벚어 나게 되면 구원의 노래가 그 안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부들의 기록들 가운데 사순절은 “낙원으로 돌아가는 여정 (the journey of returning to Paradise)” 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땅에 속한 낙원, 즉 옛 에덴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낙원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 하셨을 때, 원수가 우리를 다시 유혹하여 우리의 새로운 자리를 또 잃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가 거할 장소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직접 우리의 거처가 되시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며,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요 14: 20).

또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중보기도 가운데 다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요 17: 21).

  • 네번째로: 거룩하고 달콤한 고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슬픔(근심)들이 있습니까!

여러가지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상황은 다양합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때로는 나의 슬픔/근심의 원인이 되거나 내 안의 내적인 위기/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그들이 나를 질식 시키는 것과 같은 상황). 질병들; 분명한 이유 없는 피로와 피곤함; 무능함과 마비의 상태; 무의미​​함과 지루함등이 있습니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슬픔 (근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슬픔/근심을 정확하게 묘사하면서 우리에게 도움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우리는 세상의 치명적인 슬픔/근심을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도망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망치는 곳은 때로는 매우 어리석은 곳입니다. 술을 마시거나, 마약 또는 미디어에 의지합니다. 우리는 잊어 버리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시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의적으로 무의미함 가운데로, 혼란 가운데로, 상실감 가운데로 자신을 처하게 합니다. 슬픔/근심은 우리 안에서 증가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슬픔/근심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직면하는 방법을 알지도 못하지만 직면하기를 원하지도 않는 상태에 있습니다.

사순절은 묻혀진 슬픔/근심과 그 숨겨진 원인들과 직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금식하고, 엎드려  절하며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육에 제한을 가하고 엄격하게 하여 혼에 있는 슬픔의 곳간들이 열리고 씻겨지며, 그것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의 근면/부지런함은 때로는 “빛을 비추는 슬픔 (illuminating sorrow)”이라고 불립니다. 육체에 가하는 긴장감과 제한 때문에 그것은 “슬픔”입니다. 그것은 또한 “빛을 비춥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슬픔으로부터 자유케 되며 구원의 기쁨 가운데로 우리를 회복시키기 때문입니다. 시편 51편 12 절에 기록되기를: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아들에 관한 성경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 10).

놀랍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상함을 받게 하시며 질고를 당하게 하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it pleased Him –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외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이것은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매우 신비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기쁨은 하나이고 연합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결과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 53: 10, 11):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우리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아버지의 기쁨이기도 한 아들의 고통/고난에 참여하기를 원합니까?

그것은 빛을 비추는 슬픔입니다; 그것은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쁨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차원의 기쁨입니다; 참된, 진정한 기쁨입니다. 위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기쁨이며 영원한 위로로서 우리의 영혼 가운데 부어집니다. 주님께서 친히 다음의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해 주십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 24).

또한, 예수님께서 고난의 절정에 처해 계셨을 때 중보기도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 13).

우리는 그분의 고난에 참여 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습니까? 그분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신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망가졌고 훼손 된 것을 보시고 계십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의 신부가 세상의 더러운 것으로 얼룩덜룩 해진 것과, 신부의 장식들을 잃어 버린것과, 완전히 그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보시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아픔 가운데 기다리십니다. 당신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기쁨에 참여할 자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 13).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달콤한 고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고난의 교제/참여함을 경험할 수 있으며, 그것은 항상 우리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인정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때로는 음부로까지 내려가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고, 지옥과 같은 시간을 통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곧 방문하시고 우리를 위로 향해 올라가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의 기쁨을 맛보고 또한 아버지의 기쁨의 대상이 됩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지식은,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과 함께 음부로 내려가는 것과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완성 될 수 없습니다. 다음 말씀을 기억해 봅시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4: 9, 10).

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부활의 권능에 참여 하고자 그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 10).

  • 다섯번째는: 자신을 치는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또는 통회 그리고 변화

사순절은 또한 통회와 자기 부인의 금식입니다. 성 금요일로 끝나는 이 금식은 구약 성경의 속죄일과 연결된 것입니다. 속죄일은 자기 자신을 치는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자기를 부인하는 날로 설명 되었습니다: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레 16: 29).

‘And this shall be a lasting statute for you: in the seventh month, on the tenth of the month, you must deny yourselves’ (LEB).

그렇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자기 부인과 스스로를 치는 (괴롭게 하는) 것을 배우고 경험해야합니다. 우리의 혼은 교만하고, 자만하며, 오만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경륜 가운데서 우리의 혼의 교만함을 깨뜨리고 겸손하게 할 수 있는 특정 상황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판토크라토(Pantocrator, 전능하신 우주의 지배자) 이심을, 그리고 모든 것을 통제하시고 그분이 허락하시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때때로 허락하시는 어려운 상황과 상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바꾸도록 합시다. 이 세상의 임금이 (사단) 제안하는 세상 사람들의 태도와 방식을 따라 긴장하고, 동요하며 불안해 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하며 하나님의 경륜을 온전한 신뢰로 받아들이고 우리를 위한 그분의 구원을 기다립시다.

그렇게 하는 그 시점에 은혜가 우리 안에 거하기 시작할 것이고, 주님이신 그리스도 당신께서 점차적으로 우리 영혼에 거하시고 우리의 영혼 안에서부터 그분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집트의 콥틱 교회의 전통에 따라 성 금요일에 하는 각 방향마다 수많은 엎드려 절하기 (400 번)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이 땅의 사방의,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스스로 괴롭게 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다면, 그리고 우리 내면 안에 거하시는 것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면, 그분께서는 세상의 구원에 있어서 우리를 당신과 함께 참여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로브의 성 세라핌 (Saint Seraphim)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평강으로 가득 차십시오 (평화의 왕인 그리스도와 연합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당신 주변의 수천 명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신 후에 은혜의 변화의 상태입니다.

그렇습니다. 변화산의 구름은 우리의 영혼과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 가운데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 3: 16).

하나님의 뜻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기념책으로 하늘을 채우겠습니까?

먼저 이 금식의 회개를 통해 책에서 죄를 지워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롬 8 : 29)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변화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책을 희게 만들도록 합시다.

그러면 주님을 위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거룩함, 우리의 예배,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우리의 영적인 열심과 근면에 대한 기억들이 적히고 새겨질 수 있도록 우리의 책이 준비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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